2010-04-22
다음의 글에서,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그의 ‘관계적 미학(Esthetique Relationelle)’이 미술에서의 도덕적 부흥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크 랑시에르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펼친다. 부리오에 따르면, 현대 미술에서 정치적 프로그램의 중요성은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불확실한 상태를 인식한다는 데에 있다. 부리오는 최근 출판된 그의 책, 『레디컨트(The Radicant)』에서 이 주제를 좀 더 자세히 다룬다. [1]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의 미술과 정치에 대한 답변 랑시에르는 그의 최근 저서에서, 오늘날의 대부분의 사회 참여 작업을 200년동안 시대에 뒤쳐져 왔던 미술과 정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모델의 비준으로 보면서, ‘미술의 유효성을 위한 현학적 모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는 미술의 정치적 유효성이 ‘전달되는 메세지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배치, 독특한 공간의 분할, 그리고 통합되거나 분리되는, 전방이나 중심에서, 내부적이거나 무관하게, 혹은 근접하거나 원거리적인 방식들을 설명하는 시간들의 구성에 우선적으로 있다’는 랑시에르의 의견에 동의한다. [2] 그러나 그것은 사실 나의 글 『관계적 미학』에서 논의된, 작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형식적인 문제를 언급하기 위한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들 작가들의 작업의 형식을, ‘스스로를 사회적 관계로 즉각적으로 표명하는 미술의 방식’으로 잘못 이해 한다. [3] 우리는 여기서 명백히, 현대 철학자들이 상당히 공통적으로 저지르는 추상적 왜곡에 직면하게 된다. 이들은 그들이 관찰한 세계에 대한 지식의 창고와 미술 작가들의 스튜디오 사이를 잘못 연결 지음으로써, 미술이 시각적 실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컨셉을 인식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보자 : 시-공의 이러한 분할은 예를 들어 (내책에서 모두 명확히 설명된)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와 리크릿 티라바니야(Rirkrit Tiravanija) 사이의 연계점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미술과 정치의 관계가 재분배되는 실제 지점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랑시에르에 의하면, 그러한 적용의 영역이 서로 혼동되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가 일부 작업들의 살아 있는 재료가 된다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관계적 미학』에서 분석된 미술 작업들의 위치는 형식으로 묶이지 않는 사회적 관계로 결코 설명된 적이 없으며, 이러한 설명에 대해 응대한 적도 없다. 『관계적 미학』이 출간된 이래로, 미술에서 ‘관계’에 관련해 제기된 논쟁들은, 기본적으로 책에서 묘사된 작업들의 윤리, 정치, 그리고 미학의 각 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업들은 순수하게 ‘사회적인’ 혹은 심지어 ‘기독교적’이거나 ‘연민 어린’ 미술을 생산하면서, 형식 보다 도덕성을 더 중요시 한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 그들은 천사같이 착한 윤리적 모델을 제시하면서,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을 숨긴다고 지적 받아 온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관계적 미학』 책에서 새로운 형식의 상태(혹은 새로운 ‘형식화’, 만약 우리가 그러한 ‘신체의 배치’ 를 그 정의 내에서 정확하게 포함하는 요소들의 역동적인 성격에 대한 의문을 주장한다면,)의 출현이 이미 토론 되었고, 윤리학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더 당황스러운 것이었다고, 이는 관객과 관객이 마주하는 작업을 이어 주는 대인관계적 차원을 위한 변화무쌍한 배경으로 간주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리크릿 티라바니야와 리암 길릭 작업의 윤리적인 차원은 내 책에서 내 세운 요점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의 작업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점은, 대인관계의 레벨에서 혁신적인 방식으로 전시를 고안해내는 그들의 방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내 책에서 논의된 작가들의 작업들은 정치와 윤리의 분야에서 매우 이질적인 관계를 보여주며, 하나의 지구적 이론으로 유도되지 않는다. 어떤 윤리가 바네사 비어크로프트(Vanessa Beercroft)와 크리스틴 힐(Christine Hill)이 가진 공통적인 윤리인가? 무엇이 그들이 정치에서 공유하고 있는 관계란 말인가? 문제는 기본적으로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망 안에 상주한다. 랑시에르는 티라비니야의 작업에 대한 묘사하면서, 처음부터 티라비니야 작업의 형식적 차원을 간과한다: 랑시에르는 그 작업의 배치에 대해, ‘전시를 찾은 방문객들을 행동, 대화, 그리고 집단적인 토론에 참가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캠핑 가스 스토브, 물주전자, 그리고 즉석 수프를 보여준다…’ [4] 고 쓴다. 이것은 작업은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실제의 설명이 되지 못한다: 색상, 공간에서 요소들의 배치, 전시 공간과의 대화, 설치의 형식적 구조, 그리고 그것을 위한 프로토콜은 왜 다루지 않는가? 사 티라비니야의 전시는 랑시에르가 ‘묘사하는’ 것처럼, 요약적 배치에 제한된 적이 없다. 랑시에르는 여기서 작업의 실제 아이디어가 무엇인지를 다루기 보다는, 작업의 포괄적이고 불분명한 개요만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베르메르(Vermeer)를 여자들의 사소한 행위들이 일어나는 가정의 내부를 그리는 화가로 묘사할 수도, 요셉 보이스(Joseph Beuys)를 동물들과 대화나 나누는 무당같은 인물로 격하시킬 수도 있다. 여기서 난관은 건축적 구조의 중요성, 철학적 인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티라비니야(Travanija)의 작업의 중심에 놓인 형식의 사용에 대한 이슈에서 예술적 배치를 강조하는 형식적 모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그러한 구조가 ‘행동, 대화, 혹은 집단적인 토론’을 위해 기획되어졌다고 주장함으로써, 은연 중에 작가의 작업에 정치적 관점을 부여한다. 티라비니야는 단지 회의실을 건축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러한 공간의 사용적 기능은 랑시에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형식화되고 추상적인 배경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현대 미술에서 윤리를 도출해낼 수 있는가? 미술적 생산의 이질적인 성격과 작가들이 작업에 끌고 오는 이론적 출처의 엄청난 다양함을 고려할 때, 이 요구는 완전히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보다는 무엇이 오늘날의 미술에서 윤리적 철학에 대한 ‘받침(holder)’이 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미술 작업 자체? 작업의 수용 양식? 작업에 사용되는 재료들? 작업의 생산과정? 현대의 형식적 풍경의 지배적인 특징과 작가에 의한 기호의 착취와 운영에 있어서의 일종의 불변성은, 이 복잡한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을 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파편적인 대답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질문에 붙어 있는 대상들만큼이나 불확실한 것이 될 것이다: 게다가, 불확실성은 이러한 윤리성의 ‘실재’이자 지배적인 특징을 구성한다. 따옴표 사이에 단어를 넣음으로써, 나는 라캉적인 실재를 언급한다. 즉, 가시적인 모든 요소들이 주변에 조직되는 중심부이자, 그것의 왜곡된 상과 그림자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텅빈 형식으로서의 실재말이다. 이것에 기반하여: 첫째, 현대 미술의 모든 윤리적 반영은 실재에 대한 그것의 정의에 불가분하게 묶여져 있다. 둘째, 현대 미술의 실재는 불확실함 속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자. 그리고 이 불확실함의 여러 형태들은 마우리조 카틀란(Maurizo Cattelan)과 토마스 허쉬호른(Thomas Hirschhorn)의 작업을, 리크릿 티라바니야(Rirkrit Tiravanija)와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어스터(Dominique Gonzalez-Foerster)의 작업을, 그리고 켈리 워커(Kelly Walker)와 울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의 작업과 토마스 프(Thomas Ruff)의 작업을 서로 연결시킨다. 불확실한 세상 지속성—그것이 사물에 관한 것이든, 관계에 관한 것이든—의 드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미술 작업들을 볼 때,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소비주의를 선호하고 지속적인 모든 것을 파괴하는 지구적 경제 기계의 중심부에서, 지속성을 가장 위협하는 불확실성(precariousness)에서부터 문화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내 가설은 미술이 이렇게 새롭고 불안정한 환경에 저항하는 수단을 찾았을 뿐 아니라, 거기서부터 어떤 특정한 방식을 도출해 낸 것같다는 것이다. 미학의 불확실한 체제는 속도, 간헐성, 불분명함, 그리고 연약함에 기반하여 발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일회성과 지속성 사이에서 반대적 태도를 고수하거나, 지속정을 진정한 미술의 기준으로, 혹은 일회성을 야만주의의 신호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일회적 무상함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에 기반하여 문화 (그리고 윤리)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말한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지속되는한 문화적이다’; 여기서 지속성은 기능성과 반대적 개념이다. 기능성은 사용되거나 소모됨으로써, 현상적 세계에서 사물을 사라지게 하는 특징이다. [7]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새로운 환경에서, 미술 작품의 물리적 지속성은 그것의 정보적 지속성과는 분리되며, 작품의 개념적 그리고/혹은 재료적 불확실성은 문화와 미술에 새로운 접근을 수립한 새로운 윤리적, 미학적 가치와 결합된다. 내 생각에는, 진정한 혁신적 관계 미술의 기반이 되는 불확실한 환경은 대체로 작업의 비물질적이고 일회적인 특징과 혼동된다. 그러나 후자가 작업의 외부적 형태만을 언급하는 형식적이거나, 심지어 지속적인 속성일 뿐인 반면에, 전자는 철학적인 아이디어라는 차이점을 갖는다. 불확실성은 더 이상 물질적인 지속성이 아닌,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의미한다: 불확실성은 그 스스로를 미술 작업 자체의 구조에 안착시키며, 미학의 일반적 상태를 반영한다. 불확실한 미술 그러므로 현대 미술은 다양한 ‘매체들’의 사용을 통하여 일률적으로, 범경계성과 불확실성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 매우 비판적인 관점에서, 마르셀 브로타르스(Marcel Broodthaers)의 가상의 박물관의 흔적을 따라, 로잘린 크로스(Rosalind Krauss)를 현대 미술의 ‘후기매체(postmedia)조건’이라 부르는 것 처럼. 우리는 오늘날의 훌륭한 미술 작업들이 궤도와 개요의 형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는 것을 인지하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작업의 경우, 각각의 작업은 그 중심에 다양한 대화 상대와의 협업을 통해 차후의 프로젝트에 영향을 주는, 제작과 확산을 위한 ‘구축 지점’을 구성한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의 기능적인 모델은 불확실하다: 자크 타티(Jacques Tati)의 영화 잔칫날(Jour de fete, 1949)에서처럼 텐트를 한 장소에 놓고 그것의 효과들이 나타나게 한 뒤에 철수한다. 그러므로 미술 작업에서의 불확실성은 연약한 재료들의 사용이나 짧은 지속성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영의 토대를 구성하고, 일시적인 형식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지를 하는 역할을 하면서, 미술의 전체적 생산을 비옥하게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현재의 불확실성은 긍정적인 버전 뿐아니라, 부정적인 버전으로도 현대 미학 전반을 윤택하게 한다. 들뢰즈(Delueze)와 바타유(Bataille)에 공헌된 토마스 허쉬호른(Thomas Hirschhorn)의 거대한 설치 작업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 경의를 표했던 그의 다른 작업처럼, 전시의 제한된 시간 동안에만—때로는 24시간에 불과한—지속된다. 트리스 보나 미셸(Tris Vonna-Mitchell)의 작업은, 불확실성과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맺은 상징적인 작업이다: 그는 복잡한 슬라이드 쇼와 함께, 본인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된 구술 퍼포먼스 작업을 선보였다. 이 작업이 보여진 그의 전시는, 실제적 결론을 구성하지 않는 다른 동시적 혹은 과거의 전시들을 언급하면서, 여러 자료들을 구축해 낸다. 작업의 슬라이드, 비디오 프로젝터, 사진들, 그리고 진귀한 오브젝트들은 공간에서 끝없이 깜빡거리는 회로를 만들어낼 뿐이다. 생산 자체의 모드 이외에, 우리는 불확실함의 미학에서 트랜스 코딩 혹은 변환부호화(transcoding), 깜빡거림(flickering), 그리고 흐리기(blurring)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가지 주요 패턴을 인식할 수 있다.
a. 영구적인 트랜스코딩(transcoding): 형식적인 노마디즘 켈리 워커는 비주얼 오브젝트를 서로 연결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그는 초기의 작업의 지속적인 연장선 상에서, 발전의 연속적 상태에서 진술의 ‘정지 화면들’일 뿐인 근절된 현실을 다룬다.. 웨이드 가이톤은 작업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형식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기계적 재생산의 기술을 사용한다. 잡지, 텔레비전, 혹은 구글 검색에서 시작된 작업들은, 불안정하고 공허한 출처로 다시 돌아갈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 모든 원본의 형식들은 부정되거나, 심지어 폐기된다. 복사, 인쇄, 스크린이나 사진의 재생산으로 구성된 네트워크를 통해 움직이면서, 형식은 여러번 일시적으로 구체화된다. 가시성은 여기서 도상적 유령들의 집합이라는 정의에 의해 유목민적 존재로 나타난다; 미술 작품은 스스로를 어떤 곳에든 플러그될 수 있는 USB 스틱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b. 명멸(Flickering) : 간헐성(Intermittences) 직접적이고 연기된 것과, 아카이브된 것 사이의 이러한 새로운 구분은, 작업의 독특하고 고유한 성격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재생산될 수 없는 이벤트로서 고집하는 일부 현대 미술 작업들의 모판(seedbed)이 된다. 배우들에 의해 연출되는 티노 세갈(Tino Sehgal)의 미니멀리스트한 시나리오나 트리쉬 도넬리(Trish Donnelly)의 퍼포먼스는 뒤에 어떠한 가시적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미술적 이벤트의 ‘여기-그리고 –지금’의 특성에 대한 이러한 고집과 간접적인 아카이브적 작업 이상으로 퍼포먼스를 기록하지 않는 방식은, (그 제도적 성격이 강력한 아카이브 기구로 혼동되곤 하는) 미술 세계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고해로 구성된 긍정적인 불확실함에 대한 단언이 된다—세계는 이미 오브젝트로 가득 차 있으기에 거기에 무엇을 더하고 싶지 않다는 더글러스 휴블러(Douglas Huebler)의 유명한 진술처럼 말이다.
c. Blurring (흐리기): 식별하기 어려움 마이크 켈리(Mike Kelley)의 작업에서 흐리게 하기(blurring) 는 기호의 치환을 의미한다: 비형식의 미장센은 「Framed and Frame…」(1999) 와 같은 작업에서 흐려진다: 색상이 조각에 적용됨으로써 (스프레이 캔에서 뿌려져 착색됨) 색상이 가리고 있는 형식과 일치되지 않는다. 여기엔 켈리가 설명하듯 숨겨진 작업이 있다 : ‘의미는 구도화되면서 공간성과 혼동된다.’ 의미는 그것이 전치(轉置) 의 결과인만큼 흐려진다. 무한정의 윤리학: 미술의 불확실한 정치성 그것이 (일화적인 것 너머의) 현대 미술의 정치적인 프로그램의 필수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 불확실한 상태의 세계를 유지하거나, 다른 말로, 개인이나 집단적 행동을 지배하는 상태와 규칙들을 분할하는 제도의 환경적 특성인 일시성을 영구적으로 단언하는 것 말이다. 자본주의에서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주요 기능은 메세지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장식만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한정적이고, 부동적이며, 일정한 정치적 체계 안에서 살고 있다. 피에르 위게 혹은 리암 길릭의 관계적 규모 모델들, 더그 에이킨(Doug Aitken)의 비디오와 켈리 워커의 기호 연결은, 각자의 방식으로 역의 가설을 펼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순수한 구조이자, 미장센, 몽타주, 구성, 이야기 이다. 그리고 그것을 분석하고 재 서사화하며, 이미지나 다른 방식들로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미술의 기능이다. 랑시에르가 ‘허구로부터 실재로의 관계가 아닌 허구를 생성하는 두 방식의 관계로서의, 미술과 정치의 관계’라고 썼을 때, 미술의 기능에 대한 비슷한 결론을 시사했다. [9]
미디어에 의해 ‘가려진’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채널을 여는 것, 사회성의 대안적 모드를 고안하는 것, 서로 떨어져 있는 기호들 사이에 연관성을 창조 혹은 재창조해내는 것, 그리고 구체적인 특이성을 통하여 지구적인 자본주의의 추상성을 표현하는 것: 오늘날 진정한 정치적 미술에로의 길을 여는 불씨가 되는 효과들을 갖춘 많은 불확실한 해석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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